엔비디아의 11개월 선행 PER(주가수익비율)이 현재 약 15배 수준입니다. 닷컴 버블 당시 시스코 시스템즈의 선행 PER이 100배였다는 점과 나란히 놓으면, 숫자만으로도 지금 AI 랠리의 성격이 달라 보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저도 엔비디아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따로따로 보는 식이었는데, 이 구조를 공급망 전체로 펼쳐서 보니 완전히 다른 그림이 나왔습니다.

공급망 구조: 엔비디아 혼자 아니다
AI 칩 시장에서 엔비디아의 점유율은 약 80%입니다. 이 정도면 독점이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 힘의 핵심은 단순히 칩 성능이 아닙니다. '쿠다(CUDA)'라는 소프트웨어 플랫폼이 만들어낸 생태계 해자(Moat)입니다. 여기서 해자란, 경쟁자가 쉽게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진입 장벽을 뜻합니다. 개발자들이 CUDA 위에서 AI 모델을 훈련시키는 구조가 굳어진 탓에, 하드웨어 성능만으로 엔비디아를 대체하기는 사실상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엔비디아가 혼자 모든 걸 만드는 건 아닙니다. 칩 설계는 엔비디아가 하지만, 실제 제조는 대만 TSMC에 맡기고, HBM(고대역폭 메모리)은 한국 기업에서 조달합니다. HBM이란 기존 D램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고성능 메모리로, AI 연산에 필수적인 부품입니다. 결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고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한편에선 구글, 아마존, 메타 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엔비디아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자체 칩 설계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흐름에서 중요해진 기업이 브로드컴과 마벨 테크놀로지입니다. 직접 칩을 설계하기 어려운 빅테크를 대신해 맞춤형 ASIC(주문형 반도체)을 설계·제공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ASIC이란 특정 작업에 최적화된 반도체로, 범용 GPU보다 에너지 효율이 높고 비용을 낮출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마벨은 투자자의 날 행사에서 FY28 매출 목표로 200억 달러, FY31 목표로 700억~900억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시장 컨센서스(182억 달러)를 크게 웃도는 수치였고, 저는 이 발표를 보면서 AI 인프라 투자가 단기 테마가 아니라 구조 변화라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AMD는 점유율이 10% 미만이지만 전략이 흥미롭습니다. 자사 마진을 낮추는 가격 전략을 쓰고, HBM 탑재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엔비디아 독점을 조금씩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단기 실적보다 시장 확대에 방점을 찍은 선택입니다.
- 엔비디아: CUDA 생태계 기반 시장 점유율 약 80%, TSMC 위탁 생산·한국 HBM 수급
- AMD: HBM 탑재 확대와 저가 전략으로 점유율 10% 미만에서 추격 중
- 브로드컴·마벨: 빅테크의 자체 ASIC 설계 대행, AI 인프라 확장 수혜
- TSMC: 엔비디아·AMD 칩 위탁 생산, 공급망 중심축
- 삼성전자·SK하이닉스: HBM 공급, 공급망 최하단이 아닌 핵심 고리
삼성 재평가와 투자 전략: 숫자 뒤를 봐야 한다
글로벌 AI 랠리가 이어지는데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외국인 지분율은 각각 46.4%, 49.8%로 10년래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저도 처음엔 이 숫자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실적 기대가 있는데 왜 팔까? 그 답이 자사주 매입 구조에 있었습니다.
국내 증시 통계상 자사주 매입 기간 동안 외국인이 주식을 순매수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외국인 입장에서 자사주 매입은 확실한 단기 매수 주체가 있는 동안 차익실현을 할 수 있는 창구가 됩니다. 자사주 매입을 영구적인 주주환원이 아닌 일회성 조치로 보는 시각이 여전히 우세하기 때문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자사주 매입 종료 시점이 임박했고, 매수 주체가 사라지기 전 외국인 매물이 집중된 구조였습니다.
그렇다면 국내 반도체 기업이 진짜 재평가를 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KB증권 리포트 분석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HBM4(6세대 고대역폭 메모리) 판매 가격은 2027년에 전년 대비 100% 이상 오를 것으로 추정됩니다(출처: KB증권). HBM4란 기존 HBM3E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와 전력 효율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로, AI 가속기에서 요구하는 연산량 증가에 맞춰 개발된 제품입니다. 삼성전자의 HBM4 매출 비중은 2026년 40%에서 2027년 80%로 확대될 전망입니다. 3분기 분기 매출은 101조~109조 원 수준으로, 분기 100조 원 시대를 여는 실적이 예상됩니다.
다만 저는 숫자를 볼 때 습관적으로 단위를 확인합니다. 자료에 등장한 삼성전자 내년 연간 영업이익 '530조~600조 원 이상' 전망은 실제로는 단위 오기이거나, 매출과 영업이익이 혼재된 표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리포트 원본을 직접 찾아 확인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 이건 제 경험상 이건 꽤 중요한 습관입니다.
DBS 은행은 현재 AI 랠리를 닷컴 버블과 다르다고 평가하면서, AI 기술 성장주와 투자등급 채권을 동시에 보유하는 바벨 투자 전략을 제안했습니다(출처: DBS Bank). 바벨 전략이란 높은 위험과 낮은 위험 자산을 양쪽 끝에 배치해 중간 위험을 피하는 방식입니다. 저도 이 접근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단, AI 거품론이 완전히 해소됐다고 단정하는 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엔비디아 선행 PER이 낮다는 사실이 고점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재평가를 위한 조건을 정리하면, 장기 공급 계약 비중 확대, 지속적인 주주환원 정책에 대한 시장의 신뢰, 그리고 HBM4와 파운드리를 아우르는 기술적 해자 구축입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파운드리를 동시에 운영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기업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 구조적 강점이 숫자로 나타나는 시점이 진짜 재평가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엔비디아 PER이 낮으면 지금 사도 되는 건가요?
A. 선행 PER 15배는 과거 버블 수준과 비교하면 낮은 수치이고, DBS 은행도 내년 약 70%의 이익 성장을 근거로 거품이 아니라고 평가합니다. 다만 낮은 PER이 하락 방어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HBM 계약 가격, 빅테크 자체 칩 전환 속도, 파운드리 비용 구조 변화를 함께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Q. 삼성전자 외국인 지분율이 낮아진 이유가 뭔가요?
A. 자사주 매입 종료 시점에 맞춰 외국인이 차익실현 매물을 집중 출회한 영향이 큽니다. 자사주 매입을 일회성 조치로 보고, 확실한 매수 주체가 있는 동안 비중을 줄인 것입니다. 장기 공급 계약과 지속적 주주환원에 대한 시장의 확신이 부족하다는 구조적 원인도 함께 작용했습니다.
Q. HBM4가 기존 HBM과 다른 점이 뭔가요?
A. HBM4는 6세대 고대역폭 메모리로, 기존 HBM3E 대비 데이터 처리 속도와 전력 효율이 한 단계 더 개선된 제품입니다. 특히 가격 결정 구조가 바뀌었는데, 기존 HBM은 장기 고정 계약 특성상 D램 가격 상승분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지만, HBM4는 메모리 3사 중 가장 높은 수준에서 계약이 체결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Q. 마벨 테크놀로지가 갑자기 주목받는 이유가 뭔가요?
A. 빅테크 기업들이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자체 ASIC 설계를 추진하면서, 이를 대신 설계해주는 마벨의 역할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마벨은 FY28 매출 200억 달러, FY31 매출 700억~900억 달러라는 목표를 제시했는데, 이는 시장 컨센서스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AI 인프라 수요 확대에 대한 자신감을 반영한 수치입니다.
결론
AI 반도체 시장을 보는 시각이 이번 자료를 계기로 꽤 바뀌었습니다. 개별 종목의 주가 등락을 쫓는 것보다, 빅테크-칩 설계-파운드리-HBM-전력 인프라로 연결되는 공급망 구조 안에서 각 기업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쪽이 훨씬 의미 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삼성전자의 분기 매출 100조 원, HBM4 가격 상승, 주주환원 확대 가능성은 재평가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장기 공급 계약과 파운드리 기술 해자가 숫자로 확인되기 전까지는 전망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앞으로 반도체 관련 뉴스를 볼 때 저는 주가 등락보다 공급망 내 각 기업의 역할 변화, HBM 계약 구조, 외국인 수급 회복 여부를 먼저 체크할 생각입니다. 투자 판단 전에는 반드시 리포트 원본을 찾아 단위와 맥락을 직접 확인하는 습관도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