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안을 완성했는데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경험,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데이터는 완벽했고, 시뮬레이션 수치도 나무랄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인터스텔라를 다시 보면서, 그때 제가 놓쳤던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보였습니다.
아날로그 제작 방식이 말해주는 것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엄청난 것들을 실제로 만들었습니다. 캐나다 캘거리의 2km² 토지에 직접 옥수수를 재배했고, 아이슬란드 빙하 지대에서 촬영하기 위해 장비 이동용 도로 15km를 직접 포장했습니다. 모래 폭풍 장면은 CG가 아니라 식품 첨가제를 실제로 날려서 찍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게 감독의 고집이나 예술적 취향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현장 조사를 나가본 이후로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신규 서비스를 출시할 때 온라인 설문과 정량 데이터 시뮬레이션에만 의존했던 적이 있습니다. 수치상으로는 최적의 UI를 찾아냈다고 확신했는데, 출시하자마자 타깃 사용자들에게 외면받았습니다.
결국 오프라인으로 나가 실제 사용자들의 모바일 기기 사용 패턴을 눈으로 관찰했을 때, 데이터가 깔끔하게 정제되는 과정에서 완전히 소멸해 버린 것들이 보였습니다. 미세한 시각적 피로도, 조명에 따른 화면 가독성, 손가락 습관처럼 숫자로 잡히지 않는 맥락들이었습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에서는 이런 변수를 처리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바로 정량화(Quantification)입니다. 여기서 정량화란 현실의 다양한 요소를 수치로 변환하여 모델에 입력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문제는 정량화 과정에서 수치로 변환되지 않는 것들이 조용히 잘려나간다는 점입니다. 놀란 감독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아날로그 세트를 고집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컴퓨터가 처리하지 못하는 투박한 질감과 생생한 마찰이, 결국 관객이 화면을 보며 느끼는 '진짜 느낌'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정밀도와 그 한계 사이
인터스텔라의 과학적 배경은 실제로 상당히 탄탄합니다. 이론물리학자 킵 손(Kip Thorne)이 핵심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각본가 조나단 놀란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4년간 상대성 이론을 공부하며 시나리오를 다듬었습니다. 킵 손은 2017년 중력파 관측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인물입니다.
영화 속 블랙홀 '가르간튀아'의 시각적 묘사는 킵 손의 계산식을 그대로 렌더링한 결과물인데, 2019년 사건지평선망원경(EHT)이 인류 최초로 실제 블랙홀 이미지를 촬영했을 때 영화 속 묘사와 상당히 유사해서 화제가 됐습니다. 여기서 사건지평선망원경(EHT)이란 전 세계 여러 전파망원경을 하나의 거대한 망원경처럼 연결해 운용하는 국제 공동 프로젝트를 말합니다(출처: 사건지평선망원경 공식 사이트).
그런데 영화에는 과학적 허용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제가 직접 찾아보니 꽤 흥미로운 지점들이 있었습니다.
- 밀러 행성의 1.2km 높이 파도: 이 정도 기조력이 실제로 작용한다면 행성 내부에 극심한 마찰열이 발생해 용암이 분출되어야 합니다. 생명이 살기는커녕 착륙 자체가 불가능한 환경입니다.
- 레인저호의 이착륙 모순: 지구 중력의 130%인 밀러 행성에서 단독 이착륙이 가능한 추진력이 있으면서, 정작 지구 이탈 시에는 다단계 로켓을 사용합니다.
- 블랙홀 진입 생존: 이론적으로 특이점에 가까워지면 조석력(Tidal Force)에 의해 물체가 분자 단위로 분해됩니다. 여기서 조석력이란 천체의 중력이 물체의 각 부분에 다르게 작용해 잡아늘이는 힘을 말합니다. 영화는 이를 5차원 존재들이 만든 테서랙트 공간으로 돌파합니다.
일부에서는 이런 오류들이 SF 장르의 엄밀함을 떨어뜨린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 비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학적 정확도를 얼마나 지켰는가 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무엇을 하려 했는가?"라는 것입니다.
알고리즘이 놓친 인간이라는 변수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인물은 악당이 아니라 브랜드 교수와 만 박사입니다. 브랜드 교수는 '플랜 A'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양자 데이터 없이는 중력 방정식이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고 거짓말했습니다. 만 박사는 극한의 고립 속에서 생존 본능에 굴복해 거짓 신호를 보내고 동료를 살해하려 합니다.
이 두 캐릭터는 '극도로 논리적인 시스템'의 실패 사례입니다. 브랜드 교수의 계획은 수치적 생존 확률만을 고려한 알고리즘적 사고의 산물이었고, 만 박사는 그 시스템 안에 배치된 인간 변수가 예측 불가능하게 작동한 결과입니다.
저는 이 장면들을 보면서 제 경험이 겹쳐 보였습니다. 데이터와 수치로만 설계한 시스템이 출시 후 시장에서 작동하지 않았을 때, 그 원인은 항상 숫자 바깥에 있었습니다. 사용자의 감정적 동인, 습관의 맥락, 그리고 시스템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비공식적인 교감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를 맥락 효과(Context Effect)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맥락 효과란 동일한 정보라도 주변 상황과 감정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아무리 정밀한 회귀 분석(Regression Analysis)을 돌려도, 회귀 분석이란 변수들 사이의 통계적 관계를 수식으로 표현하는 방법인데, 이 도구만으로는 인간의 감정적 반응을 예측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General Relativity)이 시공간의 곡률을 설명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인간의 의사결정은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일반 상대성 이론이란 질량이 큰 천체 주변에서 시공간이 휘어지고 그 영향으로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입니다(출처: NASA 과학 교육 포털).
결국 인터스텔라가 제시한 '사랑'이라는 키워드는 감상적 타협이 아닙니다. 논리 시스템이 배제한 인간 변수의 복권 선언에 가깝습니다.
인터스텔라를 다시 보고 싶다면, 이번에는 과학적 오류를 찾으려는 시선 대신 브랜드 교수와 만 박사가 어디서 무엇을 놓쳤는지를 추적해 보시길 권합니다. 기획이든, 마케팅이든, 어떤 시스템을 설계하는 분이든, 그 두 캐릭터의 실패에서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교훈이 하나씩 나올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이 영화를 세 번쯤 다시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