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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멀티버스, 허무주의, 다정함)

by 야매 지략가 2026. 5. 4.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영화 장면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그냥 정신없는 B급 액션 코미디인 줄 알았습니다. 세탁소 아줌마가 평행우주를 넘나들며 세상을 구한다는 설정이 너무 엉뚱해서, 진지하게 볼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퍼포먼스 마케터로 매일 데이터와 씨름하는 제가 이 영화에서 업무 얘기를 떠올렸다는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웃깁니다.

멀티버스가 던지는 질문,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영화의 기본 설정은 간단합니다. 주인공 에블린이 평행우주 속 다른 자아들과 연결되어 그들의 능력을 빌려오는 '버스 점핑(Verse Jumping)'이라는 개념인데, 이는 단순한 SF 장치가 아닙니다. 버스 점핑이란 특정 우주의 자아가 경험한 기억과 능력을 현재 자신에게 이식하는 것으로, 쉽게 말해 "내가 그 선택을 했다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눈앞에 펼쳐 보이는 장치입니다.

저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다이어트 시장에서 마케터로 일하다 보면 고객들이 끊임없이 "완벽한 내 모습"을 쫓는 걸 목격하게 됩니다. 더 날씬한 나, 더 성공한 나, 더 행복한 나. 그 집착이 얼마나 에블린의 멀티버스 집착과 닮아 있는지, 처음 이 영화를 보면서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영화 속 수많은 우주들이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 분위기를 풍기는 무술가 우주부터,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패러디한 소시지 손 우주까지 다채롭게 펼쳐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가능성이 무한할수록, 지금 선 자리의 가치는 희미해집니다.

에브리씽 베이글과 허무주의, 너무 많이 가진 자의 공허함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는 상징은 단연 '에브리씽 베이글'입니다. 악당 조부 투파키가 만들어낸 검은 베이글로, 모든 토핑이 올라가 있지만 결국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허무주의(Nihilism)를 형상화합니다. 여기서 허무주의란 어떤 가치나 의미도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적 입장으로, 쉽게 말해 "어차피 다 의미 없다"는 냉소적 세계관입니다.

조부 투파키는 인터넷을 통해 타인의 삶을 무한정 흡수하며 자아가 비대해진 인물입니다. 저는 이 캐릭터가 현대 마케팅 생태계에서 익히 보는 유형과 겹쳐 보였습니다. 콘텐츠 마케팅에서 CTR(클릭률)을 높이려고 모든 자극적인 요소를 한데 욱여넣다 보면, 정작 브랜드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사라지고 노이즈만 남는 현상이 생깁니다. CTR이란 광고나 콘텐츠가 노출됐을 때 실제로 클릭한 비율을 뜻하는데, 이 수치를 끌어올리려다 브랜드 아이덴티티(Brand Identity)를 잃는 경우를 제가 직접 목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에브리씽 베이글은 일본 선불교의 '엔소(Enso)'와도 연결됩니다. 엔소란 원을 한 번의 붓질로 그리는 선불교의 수행 방식으로, 완전함과 공허함을 동시에 표현하는 상징입니다. 불교 철학의 '공(空)', 즉 슈냐(Shunya) 개념과 맞닿아 있는데, 이는 만물이 고정된 실체 없이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영화가 동양 철학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녹여낸 방식은, 서양 실존주의 영화들이 보여주지 못한 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02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 영화가 작품상을 포함해 7개 부문을 수상한 것은 단순한 오락성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출처: 미국 아카데미 공식 홈페이지). 철학적 깊이와 대중적 형식이 균형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구글리 아이와 실존주의, 허무 이후에 남는 것

검은 베이글의 반대편에는 '구글리 아이'가 있습니다. 에블린이 이마에 붙이는 작은 인형 눈알은, 불교 철학에서 깨달음을 얻은 자의 이마에 열린다는 세 번째 눈, 즉 아즈나 차크라(Ajna Chakra)에 대한 레퍼런스입니다. 아즈나 차크라란 인도 철학에서 직관과 내면의 통찰을 관장하는 에너지 센터로, 쉽게 말해 세속의 혼란 너머를 바라보는 깨어있는 의식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상징이 특별한 이유는 화려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비싸지도, 크지도 않은 1센트짜리 인형 눈알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마케팅 격언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모든 사람을 타겟팅하는 것은 아무도 타겟팅하지 않는 것과 같다." 베이글이 모든 토핑을 욕망하는 메시지라면, 구글리 아이는 딱 하나의 점에 집중하는 의사결정을 상징합니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란 인간이 먼저 존재하고, 이후에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간다는 철학적 관점입니다. 허무라는 진실을 직면한 뒤에도 극락으로 떠나는 대신 세상에 남아 타인에게 선함을 베푸는 것, 그게 에블린이 선택한 방식입니다. 허무를 부정하지도, 그렇다고 거기 잠겨 있지도 않은 이 태도를 영화는 '공가중(空假中)' 철학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비어 있음(空)'과 '있는 그대로의 현실(假)'을 동시에 받아들이며 균형을 찾는 불교 중관 철학의 핵심 개념입니다.

영화가 이 단계에서 제시하는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허무주의를 인정하되, 거기 머물지 않는다
  • 타인의 삶(다른 우주)이 아닌, 지금 내 삶의 인연에 집중한다
  • 다정함은 감정이 아니라 의도적인 선택이다

이 세 가지가 결국 영화의 실존주의적 해답입니다.

다정함이라는 무기, 마케팅과 삶이 닿는 지점

남편 웨이먼드의 대사 "나는 다정함으로 싸운다"는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 문장입니다. 저는 처음엔 이 대사가 다소 감상적이라고 느꼈습니다.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혼돈 속에서 '다정함'이라는 해답은 너무 단순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현장에서 일해보니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퍼포먼스 마케팅에서 ROAS(광고 지출 대비 수익률)를 극대화하려면 수치 최적화에 집착하게 됩니다. ROAS란 광고비 1원을 투자했을 때 얼마의 매출이 발생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로, 디지털 광고 업계에서 성과를 판단하는 핵심 기준입니다. 그런데 이 숫자를 쫓다 보면 고객을 데이터 포인트로만 바라보게 되는 시점이 옵니다. 고객도 결국 에블린처럼 혼란스럽고, 피곤하고, 누군가의 진심 어린 말 한마디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가 브랜드를 신뢰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진정성 있는 커뮤니케이션'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화려한 멀티버스 카피가 아니라, 고객이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느끼는 감정에 공명하는 메시지가 더 강하게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웨이먼드의 다정함이 바로 그 역할을 합니다.

영화의 인연론도 이 맥락에서 읽힙니다. 수만 개의 우주 속에서 악연이었던 인물이 다른 우주에서는 소중한 동반자로 등장하는 장면들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특별한 확률의 산물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 결말이 너무 교과서적이라고 느끼기도 하는데, 저는 오히려 그 단순함이 이 영화의 가장 정직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결국 에블린이 수많은 우주의 지혜를 통합한 뒤 선택한 것은 거창한 영웅적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딸에게 다가가고, 남편 손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배제하고 지금 이 자리를 선택하는 것, 그게 영화가 말하는 가장 강력한 답입니다. 저도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업무 중에 멈추는 횟수가 늘었습니다. 숫자 너머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 그게 마케터로서도, 사람으로서도 더 오래가는 방식이라는 걸 이 영화가 다시 확인시켜 줬습니다.


참고: https://youtu.be/tP0xrERvEp8?si=73F_BCtzVEu7xB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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