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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기완을 만났다 (진정성, 시스템 결함, 생존 자금)

by 야매 지략가 2026. 5. 5.

광고 예산을 집행하다 보면 숫자 뒤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게 됩니다. 저도 한때 그랬습니다. 그런데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를 읽고 나서,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흔들렸습니다. 어머니의 시신을 판 돈 650유로를 들고 벨기에 브뤼셀에 도착한 탈북자 로기완의 이야기는, 마케터의 눈과 시스템 메이커의 눈을 동시에 가진 저에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혔습니다.

650유로가 증명한 것: 진정성(Authenticity)이 최고의 콘텐츠다

퍼포먼스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다 보면 예산 효율을 따지는 일이 숨 쉬듯 자연스러워집니다. 퍼포먼스 마케팅이란 광고비 대비 실질적인 전환, 즉 구매나 가입 같은 행동 결과를 수치로 측정하고 최적화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저는 대행사에서 수천만 원짜리 캠페인을 굴리면서도 정작 그 숫자 뒤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로기완의 650유로는 달랐습니다. 이 돈은 단순한 유동성 자산이 아니라, 어머니의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중국 연길에서 밤낮으로 일하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시신이 팔려 마련된 4,000달러 중 일부. 로기완은 그 돈을 방수포에 싸서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제가 광고주의 예산을 대시보드로 모니터링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무게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마케팅에서는 강력한 카피라이팅과 정밀한 타기팅이 전환율을 결정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카피라이팅이란 광고 문구나 설득 문장을 작성하는 기술이고, 타기팅이란 광고를 보여줄 정확한 대상을 설정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다이어트 시장에서 고객의 결핍을 파고드는 캠페인을 운영해 본 적이 있는데, 아무리 정밀하게 타깃을 잡아도 메시지에 진심이 없으면 전환율이 바닥을 쳤습니다.

로기완이 벨기에 난민 심사에서 결국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도 이와 같았습니다. 다섯 장의 자술서에 쓴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담당 공무원의 마음을 움직였고, 6개월 만에 난민 지위와 함께 매달 약 700유로의 최저 생계비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정교한 전략이 아니라 가공되지 않은 진실이 타겟(공무원)을 설득한 것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시스템이 냉정하게 서류로만 판단한다고 믿어왔으니까요.

실제로 난민 신청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지는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유엔난민기구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난민 신청자 중 난민 지위를 정식으로 인정받는 비율은 국가마다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절반에 못 미치는 수준입니다(출처: UNHCR). 로기완처럼 신원을 증명할 서류조차 없는 경우라면 그 가능성은 더욱 낮아집니다.

로기완의 여정에서 제가 마케터로서 특히 주목한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 650유로라는 자본의 감정적 무게가 그의 생존 동기(Motivation)를 만들었다
  • 서류 없는 탈북민이라는 포지셔닝(Positioning) 실패가 대사관에서의 문전박대로 이어졌다
  • 자술서의 진정성(Authenticity)이 모든 전략적 결함을 뛰어넘는 전환 트리거가 되었다

시스템이 멈추는 순간: 예외 처리 불가 알고리즘의 한계

저는 업무에서 노션이나 구글 시트로 워크플로우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가장 두려운 상황이 하나 있는데, 입력값이 누락됐을 때 전체 프로세스가 멈춰버리는 오류입니다. 개발 용어로 말하면 엣지 케이스 처리 실패입니다. 엣지 케이스란 일반적인 규칙으로는 처리하기 어려운 극단적이거나 예외적인 상황을 말합니다.

로기완이 남한 대사관에서 경험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탈북민임을 증명할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당한 그 장면은, 시스템이 요구하는 입력값이 없을 때 인간을 오류 메시지처럼 내쳐버리는 관료주의의 민낯을 보여줍니다.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대부분의 행정 시스템은 정상 케이스에만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예외 상황에서는 그 경직성이 잔인할 정도로 드러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스템의 결함을 깨뜨린 것이 또 다른 시스템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엘렌 원장이라는 '비정형적 인간 변수'가 개입하면서 로기완의 이야기는 달라졌습니다. 그녀는 로기완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고 직접 벨기에 내무부에 연락하는 등 행정적 개입을 이끌어냈습니다. 회복 탄력성(Resilienc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시스템이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았을 때 붕괴하지 않고 원래 상태로 복구하거나 유연하게 적응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로기완을 구한 것은 시스템의 완결성이 아니라 엘렌 원장이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회복 탄력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결말은 더 강렬합니다. 로기완은 6개월간의 사투 끝에 얻은 난민 지위와 매달 700유로의 안정적인 지원을 스스로 포기합니다.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영국으로 밀항한 라이카를 찾아 떠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시스템 설계자의 시각으로 보면, 이건 최적화된 경로를 스스로 이탈하는 무모한 선택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것이 가장 인간적인 의사결정(Decision Making)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의사결정이란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행위인데, 로기완의 선택은 데이터가 아닌 감정과 관계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실제로 사회학에서 인간 행복의 가장 강력한 예측 변수는 소득이나 지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질이라는 연구 결과가 오랫동안 축적되어 왔습니다. 하버드대학교의 성인발달연구(Harvard Study of Adult Development)는 75년 이상의 추적 연구를 통해 행복하고 건강한 삶의 핵심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따뜻한 인간관계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출처: Harvard Study of Adult Development). 로기완의 영국행은 그 연구 결과를 삶으로 증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소설이 액자식 구성을 택한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김작가'라는 관찰자가 로기완의 행적을 직접 벨기에까지 추적하며 기록하는 구조인데, 이는 고통받는 타인의 서사를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연대임을 시사합니다. 저도 이 글을 쓰면서 비슷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조금씩 더 인간이 됩니다.

 

결국 로기완의 이야기가 저에게 남긴 질문은 하나입니다. 저는 지금 숫자를 최적화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가. 마케터든 시스템 메이커든, 일의 중심에 사람을 두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이 소설은 650유로 한 장 한 장에 새겨두었습니다. 소설을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데이터나 시스템을 다루는 일을 하는 분일수록 한 번쯤 천천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youtu.be/iz80HjqhPuY?si=RVSq4fF8R7WjoqS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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